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른스트 기데온 (문단 편집) === 바이에른 계승 전쟁과 오스트리아-오스만 전쟁 === 1763년 7년 전쟁이 끝난 뒤 다운 백작이 군 통수권자가 되었다. 이때 다운 백작과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던 라우돈 남작은 소외되었다. 그러다가 1766년 다운 백작이 사망한 후 [[프란츠 모리츠 폰 라시]]가 전쟁 평의회 의장으로 취임하자, 라우돈 남작은 그해 3월 24일에 보병 감찰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라우돈 남작은 라시 장군 사이에서도 갈등을 빛었고, 라시 장군과 친밀한 사이였던 [[요제프 2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선출되자 쿠텐베르크 근처의 자신의 소유지에 은거했다. 1769년 8월 라우돈 남작은 요제프 2세와 라시, 그리고 몇몇 장군들과 함께 나이세에서 프리드리히 대왕과의 회담에 참석했다. 이때 프리드리히 대왕은 7년 전쟁 때 라우돈의 활약상에 대해 찬사를 표했다. 일설에 따르면, 프리드리히 대왕은 라우돈 남작에게 "Herr Feldmarschall(원수님 만세)"라는 인사말을 건넸다고 한다. 1769년 11월 13일, 라우돈 남작은 마리아 테레지아의 중재에 힘입어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3년 동안 맡았다. 그러다가 1775년 쿠텐베르크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나자, 라우돈 남작은 쿠텐베르크 근처에 있는 자신의 소유지를 모조리 청산하고 빈으로 이주하기를 원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직접 그의 재산을 넉넉한 조건으로 구입해줬고, 라우돈 남작은 그 덕분에 빈의 저택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었으며 1776년에 빈 근처에 있는 헤더스도르프 영지를 사들이고 그곳에 성을 쌓았다. 1778년 2월 27일, 라우돈 남작은 마침내 제국군 원수에 임명되었다. 그 후 [[바이에른 계승 전쟁]]이 발발하자, 라우돈은 라시 장군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라이헨바르크와 엘베 강 사이의 보헤미안 국경 지대로 군대를 이동시켰다. 하지만 건강이 좋지 않았던 그는 군대가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에 집중되는 동안 빈에 남아 있다가 4월 4일에 프라하에 도착했다. 그후 오스트리아군은 프로이센군과 대치했으나 별다른 전투를 벌이지 않았다. 그 사이 마리아 테레지아는 아들 요제프 2세에게 전쟁을 끝낼 것을 촉구했고, 결국 1779년 5월 13일 테센에서 양측은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1778년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가 연합하여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벌였다. 이때 라우돈 남작은 자신이 야전 지휘를 맡을 수 있게 해주기를 희망했다. 요제프 2세는 그가 고령이라는 이유로 거부했으나 군대 지휘관 리히텐슈타인 공이 병에 걸리고 아군이 오스만군에게 고전을 면치 못하자 할 수 없이 라우돈 남작을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라우돈 남작은 8월 18일 두비카 요새를 포위하고 있던 오스트리아군과 합류한 뒤 공세를 개시해 8월 26일 두비카 요새를 함락시켰다. 이후 그는 9월 7일 노비 요새를 포위 공격해 한달 간 맹렬한 공격을 퍼부은 끝에 10월 3일에 함락시켰다. 뒤이어 베르비르 마을로 진군하려던 라우돈 남작은 때이른 눈이 내리자 계획을 중단하고 군대를 겨울 숙영지로 돌려보냈다. 이후 그는 지휘권을 이양한 뒤 12월 9일 빈으로 돌아와 시민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1779년 초, 요제프 2세는 심각한 병에 걸려 다가오는 전역의 전반적인 지휘권을 맡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사람들은 라우돈 남작이 총사령관이 되리라 예측했으나 실제로는 [[안드레아스 그라프 하디크 폰 푸타크]] 장군이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라우돈 남작은 하디크와 친한 사이였기에 이에 대해 반발하지 않았고 크로아티아에 주둔한 군단의 지휘권을 맡았다. 이후 라우돈 남작은 지난 해에 날씨 때문에 점령하지 못했던 베르비르 마을로 진격했다. 6월 24일 베르비르 마을을 포위한 그는 포격을 개시했지만 병력이 부족해서 완전히 포위하지 못했다. 요새 수비대는 최선을 다해 맞섰으나 요새가 대부분 폐허로 변하자 7월 8일 오전 5시에 요새를 탈출했고 라우돈 남작은 베르비르 마을을 점거했다. 이후 요제프 2세는 하디크를 경질하고 라우돈 남작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한 뒤 [[베오그라드|벨그라드]]를 공략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라우돈 남작은 8월 30일 12만 대군을 이끌고 벨그라드를 향해 출격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3만 2천 명에 달하는 병사들이 전염병에 걸려 사망하는 악재가 발생했고 벨그라드 수비대 역시 온 힘을 다해 그에게 저항했다. 전투 도중 막 점령한 벨그라드 교외를 순찰하던 라우돈 남작은 갑자기 튀어나온 말에게 발길질을 당해 들것에 실려나갔다. 병사들은 이에 동요했지만 그의 부상이 심각하지 않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가까스로 진정되었다. 이후 라우돈 남작은 후방에서 쉬면서 부관들에게 자신 대신 지휘를 맡게 했고, 10월 8일 벨그라드는 마침내 함락되었다. 이후 라우돈 남작은 연말에 오르소바 요새를 포위했지만 악천후로 인해 철수했다. 라우돈 남작은 1779년 12월 빈에 귀환해 요제프 2세의 환대를 받았고, 요제프 2세는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훈장을 그의 가슴에 친히 달아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